잡동사니

[지리산 둘레길에서] 이 길에서 우리 스스로 절개와 품격을 지닌 사람 되자

HL5FXP (玄心) 2016. 10. 27. 21:58

[지리산 둘레길에서] 이 길에서 우리 스스로 절개와 품격을 지닌 사람 되자

그림· 이호신 화가   글·이상윤 숲길 상임이사


구례 오미~방광 구간

하늘, 사람, 땅이 온전히 만나 소통하는 계절이다. 높고 파란 하늘 아래 황금빛 들판이 출렁이고, 낮은 자세의 사람들이 추수를 한다. 벼, 콩, 고추, 들깨, 그리고 어느새 땅에 뿌리를 박고 당당히 모습을 갖춰가는 무, 배추들….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에는 하늘 아래 사람들이 의롭게 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바다 건너 동쪽 땅에 신선이 산다고 믿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지리산이 삼신산 가운데 으뜸인 방장산으로 불렸다. 넉넉함과 풍요로움만으로 으뜸을 논하기보다 그 속에 들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절개와 품격을 지녔기에 가히 지리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이 길에서 우리 스스로 절개와 품격을 지닌 사람이 되자. 지리산에 걸맞은….

              

   사도리 하사마을 60×47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의 하사, 상사마을은 원래 한 마을이었다. 지금 논이 있는 자리까지 모래톱이 발달했고 제방이 생기며 평야지대가 생겼다. 사도리에 얽힌 이야기, ‘도선국사가 이인(里人: 동네사람)을 만나 천하의 운명을 묻자 모래 위에 삼국도를 그렸고, 그래서 사도리(沙圖里)라 불렀다는 것. 하사마을에는 주변을 잘 간직하는 저수지가 있다. 모내기하는 농부, 마을의 사계절과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시때때로 보여 준다. 벅차고 힘겨운 생의 모습이 호수에 비치면 고요와 평온만이 남아 담긴다. 해가 질 무렵 이곳에 서면 석양에 물든 하늘 아래 샛별이 뜨고 어둠이 살짝 내린 들녘엔 사람의 그림자가 뜬다. 삶의 숭고함을 풍경이 말해 준다. 침묵의 시간이다.


구례의 가을 60×47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구례의 가을 60×47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오미~방광을 걷다 만나는 구례의 가을 풍경은 하늘이 선사한 선물이다. 구례구역을 지나 구례읍으로 흐르는 섬진강, 너른 분지로 펼쳐지는 구례읍과 그 주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과 자연이 잘 어우러져 있다. 섬지뜰에 오곡이 익어가고 그 사이 사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정겹다. 산과 평야를 가르는 섬진강의 유장함 또한 일품이다.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 새겨볼수록 마음에 드는 구례군의 ‘랜드마크’이다. 지리산 어느 지자체는 ‘알프스’를 갖다 붙였다. 자기 지역의 특성을 잘 살려 정책으로 삼고, 지속성을 가지는 정신이야말로 지역을 넘어 세계적인 일이 아닐까.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조선의 ‘양반’, 운조루 주인 류이주(柳爾胄). 운조루의 으뜸은 ‘타인도 열게 하여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하라’는 글이 적힌 뒤주. 고관대작들이 저마다 부를 자랑하기 위해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백성을 종 부리듯이 하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러한 조선의 봉건제도 아래 진정한 양반으로서 뭇 백성을 살피고 백성 스스로가 이웃에 대한 배려심을 갖게 이끈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 뒤주를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후손의 말을 빌리면 운조루는 해마다 30가마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눴다고 한다. 궁핍한 춘궁기,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을 텐데. 그래서 제 잇속을 우선하는 사람들이라면 퍼내고 퍼갔을 것이고 채워도 채워도 모자랄지도 모르는 일. 타인능해 뒤주에는 눈치 보지 않고 퍼갈 수 있게 배려한 주인과 내 욕심을 넘어 이웃과 더불어,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당몰샘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당몰샘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상사마을 초입에 있는 당몰샘. 쌍산재 입구 주차장 한 곁에 누각이 있다. 물빛이 깊다. 상사마을에서 만든 당몰샘 안내문에는 ‘지리산 약초 썩은 물이 모인 당몰샘, 장수촌 비결이다’, ‘조선 말 의성김씨 선조가 당몰샘 물을 달아 봤는데 다른 곳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고 수량이 풍부해 정착했다’고 적혀 있다. 당몰샘은 또한 2004년 한국관광공사 10대 약수터로 선정되었다. 실제로 물이 가진 성분에 따라 사람들의 건강도 다르다고 한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우물이 있었고, 샘은 마을 사람의 중요한 생활기반이다. 각종 화학물질 사용으로 말미암아 지표면의 오염이 높아지고, 지하수마저 탁해지는 요즘 당몰샘을 지켜갈 지혜가 절실하다. 상사마을 선조가 들어온 지 500여 년이 지났고  샘이 있었기에 정착했다는 사실로 미뤄 당몰샘은 1,000여 년의 역사를 지녔음이 분명하다. 인근 하사마을 샘도 복원되었다. 생명수, 물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빌어본다.


매천사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매천사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매천 황현(1855~1910). “국가에서 선비를 키운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아니 하겠는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성을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었던 책을 저버리지 아니 하려고 길이 잠들려 하니 죽어서도 통쾌함을 누릴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마라”(김택영 [황현전] 지리산권문화연구단 연구총서1, 지리산과 인문학 10쪽 발췌)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지리산둘레길 방광마을에서 멀지 않은 구례 광의면 월곡마을에 있는 매천사는 그가 자결한 곳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한다.” 망하는 국가는 결국 내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는 매천의 꿰뚫어 봄이 놀랍다.


수한마을 이장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수한마을 이장  47×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6



자기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평생 잃지 않는 사람이 마을마다 한 사람만 있으면 온 나라 구석구석이 평화로울 것이다. 둘레길이 열렸을 때 수한마을 김형선 이장님이 그랬다. 건너마을 용방사람이었지만 아내가 할머니에게 집을 물려받는 바람에 이 마을 사람이 되었다. 길이 열리자 이장님은 마을 이용자들이 한 줄 건의와 마을에 대한 소감을 적을 수 있도록 게시판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요구를 귀담아 듣고,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 외부의 칭찬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예전에 직업 군인이었던 만큼 내 고장 알리는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리산에 사는 게 어떠냐는 물음에
“대한민국 사람치고 지리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냐”고 반문한다. 지리산 사랑이 넘치는 지리산 사람이다.

협찬·한국등산트레킹지원   | 후원·산림청


[출처] 월간 산 2016년 10월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14/20161014014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