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산행/영남지역

세종대왕자태실을 들머리로 하는 선석산 - 영암산 산행 - 11년 6월6일 산행

HL5FXP (玄心) 2011. 6. 6. 16:39

■ 산행일자 : 2011년 6월06일(月)  ★제56회 顯忠日

-,2011년도 제27차 산행


■ 산행지 : 경북 성주 선석산(禪石山/742.4m) - 칠곡 영암산(鈴岩山/782m)


■ 산행자 : HL5FXP 홀로  


■ 산행코스 : 세종대왕자태실 - 불광교 - 태봉바위 - 용바위 - 선석산 - 영암산 - 영암산 북봉 - 월명성모의 집


■ 산행거리 : 8.8km(GPS 측정치)


■ 산행시간 : 산행시작 13시20분 - 산행종료 17시33분 (4시간13분)


-,1310 :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 입구 주차장/차량주차

~ 1320까지 세종대왕자태실 관람


-,1320 : 세종대왕자태실 입구/산행시작 

-,1337 : 불광교

-,1421 : 비룡산 갈림목

-,1426 : 태봉바위

-,1433 : 용바위


-,1440 : 선석산(禪石山/742.4m)

★선석산의 異名은 서진산(棲鎭山) - 누진산(樓鎭山)이라는 정상 표지석은 서진의 誤記

~ 여기 선석산 정상에서 1455까지 점심을 하며 휴식


-,1525 : 세종대왕자태실 방면 삼거리 갈림목

★선석산 1.6km - 영암산 1.2km - 세종대왕자태실 2.7km


-,1528 : 보손지 갈림목

-,1556 : 영암산 암릉 시작


-,1615 : 영암산(鈴岩山/782m)

~ 여기 영암산 정상에서 1625까지 휴식


-,1641 : 영암산 북봉(784m)

★여기 북봉의 해발이 영암산(782m)보다 더 높음


-,1733 : 월명성모의 집/산행종료

★여기서 성주 초전 Call Taxi로 세종대왕자태실까지 이동(요금 17,000원)/차량회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胎峰) 정상에 소재하는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로써, 그 조성시기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1977년 태실에 대한 정비사업과정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2점(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각 1점 소장),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碗)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평저호(平底壺)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지석(誌石) 3점(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蓋碗石)(저경(底徑) 102㎝, 고(高) 42㎝), 구형(求形)의 중동석(中童石)(고(高) 26㎝, 하경(下徑) 80㎝, 상경(上徑) 75㎝), 방형(方形)의 연엽대석(蓮葉臺石)(변(邊) 125.5㎝. 고(高) 60㎝),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비문에 ‘ㅇㅇ(대)군명태장 황명연호연월일입석(ㅇㅇ(大)君名胎藏 皇明年號年月日立石)’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세조가봉비 비문은 멸실(『실록』에 비문 수록됨)되었다.

 

우리나라에 있어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유신의 장태(藏胎)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려의 왕실에서 태봉안 양식(胎奉安 樣式)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胎峰)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구성은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으며, 세종대왕 자태실은 왕과 태장에 대한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태봉안 양식이 변화하여 왕과 왕비 및 그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최초의 왕자태실로 그 의미가 높다 할 것이다. 태실의 조성 및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찾아지는 태실 관련 기록에서 언급된 산맥이 연결된 높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에 홀로 우뚝 솟은 반구형(半球形)의 형태를 한 최적의 입지조건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한편 세종대왕 자태실이 자리잡은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던 곳으로,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이를 이장하도록 하고 태를 안치하였는데, 여기에 관련된 전설이 현재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보면 실제 사정과는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태실 올라가는 길

 

 

 

 

 

 

 

원손(단종)태실

 

세조대왕 태실

 

 

세종대왕자태실 입구 주차장에서 선석산 가는 길

 

 

좌측으로 가면 영암산/우측으로 가면 선석산

 

여기 불광교부터 선석산 방면으로의 본격적인 산행 길이 시작 됨 - 비교적 가파른 편

 

이 이정표는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선석산 정상 올라갈 때 까지 거의 보이지 않았음 - 아이들 보물찾기 게임용으로 잘 숨겨 놓은 듯..

 

 

 

 

 

비룡산 갈림목

 

태봉바위

 

 

태봉바위에서의 조망

 

용바위

 

 

 

용바위에서의 조망

 

 

월광회(회장 오영식)는 지난 28일 선석산 정상에서 김항곤 군수를 비롯한 내빈 및 회원가족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석산 표지석

(사업비 500만원, 높이 2m, 폭 0.9m의 자연석) 제막식을 가졌다.

선석산은 서진산(棲鎭山)으로도 불려오다 1997년 3월 칠곡군 약목 청솔산악회가 누진산(樓鎭山)이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이로 인해 선석산을 찾는 내방객에게 혼동을 줄 우려가 있어 군의 명산인 선석산을 찾는 산악인에게 명칭을 바르게 알리고자 표지석을

설치하게 된 것.  특히 선석산은 국토지리정보원 고시 제 2000-302호(2000.12.30)호의 자연지명으로 지정된 바 있다.  (이하 생략)

[출처] 성주신문 2010년 9월10일

 

누진산(樓鎭山)이라는 정상 표지석은 선석산의 異名인 서진산(棲鎭山) 誤記

 

선석산 정상의 이정표

 

여기서 세종대왕자태실 방면으로 진행 시 차량회수를 위한 원점회귀 가능했으나 영암산을 목표로 계속 진행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영암산 정상

 

이 철 계단은 2008년 8월2일과 8월24일 두 번에 걸쳐 이 지역을 산행 할 때만 해도 볼 수 없었던 것으로 2009년 3월 세 번째  영암산 산행 때에

설치 된 것을 확인하였음(철 계단이 없을 때에는 밧줄을 이용하여 오르내렸음)  

 

 

 

 

 

 

영암산 정상에서의 조망

 

 

앞에 뾰족하게 보이는 봉우리는 영암산 북봉(782m의 영암산 보다 2m 높은 784m)

 

 

 

영암산 북봉

 

영암산 북봉에서 바라 본 선석산과 영암산

 

 

 

중부내륙고속도로 - 남김천TG 부근

 

 

 

 

계단 대신 수로를 따라....다 내려가면 이번 산행의 날머리인 월명성모의 집 입구

 

철책 바깥은 고속도로

 

 

 

 

 

여기 선석산 - 영암산 지역 산행은 이번이 4번째 (상세는 아래 URL 클릭)

1차 - 2008년 8월02일 영암산 http://blog.daum.net/hl5fxp/17679871
2차 - 2008년 8월24일 비룡산 - 선석산
http://blog.daum.net/hl5fxp/17890440
3차 - 2009년 3월14일 영암산 - 선석산 - 비룡산
http://blog.daum.net/hl5fxp/18348172